한 뼘 성장을 위한 독서

민음 북클럽 '손끝으로 문장읽기' - 문장 필사 세번째

love27hyun 2020. 8. 11. 23:54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체감했다.

맨해튼에서 라이팅클럽을 열고, 그곳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 드디어 글을 쓰게 되는 것인가를 기대했었는데 갑자기 걸려온 세탁소 남자의 전화 한 통에 상황은 역전된다.

 

분명 페이지 수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또 다른 사건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영인의 모습에서 이 소설의 결말이 결국 해피엔딩은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진부한 엔딩의 결말을 기대했던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이 소설의 '결'에 맞는 마무리를 확인하며, 책장을 덮었을 때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좀 더 가뿐한 마음으로 영인과 김 작가의 이야기를 다시 느껴 보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김 작가는 또다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감지 않은 머리는 부스스한 채 그대로였고, 수면 양말도 그대로 신고 있었다.

푸른색 환자복 위에 병원에서 일괄 지급한 것으로 보이는 핑크색 울 스웨터를 입을 채

침대 위의 식판에 상체를 괴고 앉아 뭔가를 썼다. 순환의 시간이었다.

뭔가를 쓰라고 자꾸만 부추기는 조울증의 시간,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지긋지긋한 떨림의 시간, 그리고 아무런 욕망도 갖지 못하게 만드는 무서운 침묵의 시간.

그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침묵의 시간이 제일 무서웠다.

그래도 뭔가를 쓸 때가 쓰지 않을 때보다 나았다."

-라이팅 클럽, p306 

 

 

글을 쓰는 시간을 '순환의 시간'이라고 표현한 것도 좋았고, 글을 써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고통의 시간들을 나열한 것도 좋았다. 조울증의 시간, 떨림의 시간, 침묵의 시간. 그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침묵의 시간'이 가장 무서웠다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동안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침묵의 시간을 견뎌왔을지 생각하게 했다. 무언가 쓰고 싶은 열망은 있지만 마음만큼 풀어내지 못할 때, 전혀 한 단어도 써 내려가지 못하는 그 시간을 가뿐하게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영인은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김 작가와 계동으로 돌아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매일 다투고 싸우고,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만 내던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인이 병에 걸린 김 작가를 보러 온 것도, 맨해튼의 라이팅 클럽을 두고 다시 그 계동 골목에 터를 잡는 것도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김 작가가 미국으로 떠나는 영인에게 주었던 편지를 읽고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너는 오후 3시에 태어났어. 오후 3시는 누구나 후줄근해지는 시간이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셔. 그리고 '난 지금 막 세상에 태어난 신삥이다.' 생각하며 살아.

뭘 하든 우울해하지 말고. 너는 오후 3시에 태어났어.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내가 널 낳았으니까.

하루에 한번씩 그걸 생각해야 한다."

-라이팅 클럽, p336

 

나는 이 편지가 타국으로 떠나는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오직 김 작가만이 해 줄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 소설을 읽으면서 김 작가가 엄마로서 영인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인가, 부모의 자질을 의심하게 했는데 그 또한 편견에 갇힌 생각이진 않았을까를 고민하게 했다. 서로가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영인과 김 작가가 함께한 시간이 평범하진 않았지만 내가 놓치고 있었던 순간 속에 서로에 대한 끈끈한 무언가가 그들에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김 작가가 영인을 낳은 오후 3시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민음 북클럽 온라인 독서모임 참여로 더욱 깊이 있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최종 감상평이 남았기에 자세한 소감은 뒤로 미루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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